최근에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기 시작했다. 읽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의 흐름이 그 책을 관통하는 주제와 매우 일치해서 놀랍기도 했다. 이제는 꼭 누군가에게 자랑하듯이 뭘 먹었고, 어딜 갔고, 무엇을 봤는지 기록하는 삶에서 벗어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성취를 움켜쥐듯이 쌓아두던 삶의 방식을 버리기로 했다. 더 수수해지기로 했고 불필요한 것들을 사지 않기로 했으며, 내가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나를 ‘꾸밈 노동’하는데 에너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 맥락에서 더더욱 탈피하게 된 것은 타이틀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전에는 꼭 하나 이상의 단어들로 나 자신을 설명하려했었다. 일이 삶의 전부였을 때는 마케터, 광고 기획자 아니면 글쓰는 사람 같은 직업을 나타내는 단어들로. 그러다가 직업이 한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담기에는 너무 한정적인 개념이라는 걸 깨닫고 난 이후로는 에너자이저나 유노윤호 같은 닉네임으로 나를 설명하려고 했었다. 너무나 단편적인 발상으로 정의하기에 개개인이 가진 스펙트럼은 너무나 다양하다. 언젠가 류시화 시인이 페이스북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가 만약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를 나 자신이라 여기고 그 반대 모습의 나를 부정한다면 나는 내 삶을 불구나 위선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어떤 면을 가꿀 수는 있지만, 자유는 편향된 모습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본얼굴 그대로일 때 여행은 자유롭다. 출처: 류시화 시인 페이스북 그러니까 나는 이런 단어들로 자신을 정의하거나 가둬두지 않으면 불안했던 거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정의하고, 회고하고, 개선하고, 성장해서 발전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은 어디에서 왔을까?그리고 왜 우리는 일부러 성장해야만 하지?우리의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열정까지 탈탈 털어서 자신들의 지갑을 채우려는 사측의 '같이 성장할 인재를 찾습니다' 같은 심보를 제외하면 왜, 굳이, 빠르게 성장해야만 하지. 성장은 내가 하는데 왜 그걸 일하고 얻는 합당한 댓가처럼 포장하는지 모르겠다.어느 생명체라도 가만히 두면 알아서 성장을 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성장의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성장의 퇴화도 때때로 동반될 수 있고, 어느 시점에서는 노화도 함께 이뤄진다. 여기서의 이 모든것은 자유의지와 자연의 법칙에 따른다는 전제가 있다. 불안과 압박감에서 기인한, 이른바 FOMO(Fear of Missing Out) 같은 것들이 아니라도 자신의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시행착오를 겪을지언정, 자신만의 세계를 확립하게 된다. 간혹가다 세계관이 확장되는 순간들이 찾아오는 찬스는 덤. 비틀거리다가 잠시 탈선하더라도, 진정성 있게 자신의 길을 정진하는 사람은 실패와 좌절 또한 넘어설 자격이 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의 길을 어느 누가 감히 판단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은 없겠지. 다들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을뿐, 그 생의 싸움은 누구에게나 가장 진지하고 무거울 텐데. 감히 누가 누가 누굴 판단하나요. 서류 상에 보여지는 경험들과 명함에 그럴듯하게 적힌 타이틀을 넘어서면 도토리 키재기 같은 경쟁을 넘어 더 크고 넓은 삶의 스케일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 관심이 줄곧 이 쪽으로 뻗쳐있어서 그럴지는 모르지만, 누군가는 살기 위해 난민 수용소에서 쪽잠을 자며 국경을 넘고,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이 든 시간에 일어나서 일터로 향하는 이순간에 우리가 고작 타이틀을 놓고 고민해서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허울만 좋으면서 사실은 돈 벌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는 정말로 자신의 안전을 담보로 다른 이들의 삶을 구하는 일을 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진짜로 사람을 살리는 일, 사람을 구하는 일은 무엇일까. 다시 <공정하다는 착각>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작은 물질, 이 환경, 그리고 운마저도 오롯이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탑이 온전히 나의 노력과 공에서 쌓아올려진 것이 아님을 안다면 비로소 그 자만심의 탑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낮아지고 감사하며 소외된 이들과 눈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다른 이들을 이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성장이나 경쟁의식은 끼어들 틈이 없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제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저급함을 버려야 할 때다. 이건 그 누구보다 나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이 주뒤면 새로운 분야의 문을 열고 하고싶었던 공부를 하게 되지만, 대학원에 가서 삶의 방향을 좀 더 갈고닦아보자는 결정이 결코 또다른 성취를 움켜쥐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또 다른 성취욕구에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삶의 방향이 이끄는 길을 걷다보니 좀 더 깊은 공부가 필요해졌을 뿐, 그리고 그 공부를 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을 뿐. 이 마음이 위선인지 아닌지는 앞으로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증명할 것이다. 분명히 노력 또한 재능임을 맞지만, 그 재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운은 온전히 우리의 손에 있지 않음을. 우리는 늘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야한다.